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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사 오솔길 <21> 물리학자 러더퍼드

2007-03-23 11:54:41, Hit : 1886
작성자 : 관리자
반대의견 포용한 신사 과학자
'핵분열' 연구는 극도로 혐오

 
어니스트 러더퍼드(1871~1937)는 "제자들은 나를 나이먹지 않게 한다"라는 말을 곧잘 하였다. 그는 새로운 이론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고, 매우 사교적이라 환담과 농담을 좋아하는 따뜻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러더퍼드는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건너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레 제작을 부업으로 삼고 있던 아버지를 도와 농장에서 일했지만, 학교 성적이 매우 뛰어나 장학금으로 뉴질랜드 대학을 졸업했다. 1895년에는 역시 장학금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로 유학갈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세계적인 물리학자 톰슨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1898년에는 몬트리올 맥길대학 교수가 됐다. 이후 그는 방사성의 법칙을 연구해 1902년 방사능은 물질의 원자 내부 현상이며, 원소가 자연붕괴하고 있음을 밝혀내 종래의 물질관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이는 러더퍼드소디의 이론(1903년)으로 알려졌다. 그해 그는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럼포드 메달도 받았다. 1907년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긴 뒤에는 α선 산란실험을 통해 원자 내에 극히 작은 핵, 즉 원자핵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190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소장으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해 20세기 초 영국 과학계를 대변했다. 1921년부터 러더퍼드는 런던의 왕립연구소 자연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대중들에게 다양한 강의를 해 호응을 얻었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왕립학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영국 과학 산업 연구부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영국의 과학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1914년 대영제국 기사작위를 받았고 이어 1931년에는 러더퍼드 남작이 돼 귀족의 지위에 올랐다.

러더퍼드는 훌륭한 과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참된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그 당시에 러더퍼드만큼 우수한 물리학자를 많이 배출한 사람도 흔치 않았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과학자가 훌륭한 인간성까지 보인 경우가 많지 않다. 당시 많은 물리학자들은 학술 논쟁을 좋아했는데, 남을 부정하고 비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러더퍼드는 논쟁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항상 매우 간결하면서도 극도로 맹쾌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토론을 했으며, 만일 다른 사람이 반박하면 그는 흥미 깊게 반대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러더퍼드는 제자들에게 몇 가지 원칙을 지켰는데, 가령 연구의 아이디어가 누구의 것인지 확실하게 하는데 항상 마음을 썼다. 또한 초보연구자에게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연구를 맡기지 않았으나,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스승의 주된 자질은 관대함이라고 했고, 항상 자유롭고 능률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러더퍼드는 빼어난 두뇌와 정신적 자질을 가진 프랑스의 물리학자 랑즈뱅과 매우 친숙한 사이였다. 그런데 랑즈뱅은 좌익조직에 공공연히 참여하고, 인권옹호연맹을 창시했다고 해서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하지만 러더퍼드는 제자들에게 랑즈뱅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가를 설명하고 영국왕립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도록 적극 도왔다.

 
반면 러더퍼드는 파시즘에 대한 증오가 남달랐다. 핵분열 연구에 대해서도 극도로 비난했다. 그 자신이 핵물리학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핵분열을 연구한 독일의 오토 한을 매우 싫어했다. 이 연구가 인류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러더퍼드가 이미 예측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석희 교수·부산교육대 과학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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